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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연애를 충족하는 조건은 시간만이 아니다. 이 책의 저자는 연애를 시간의 문제보다 장소적 문제로 본다. 왜 그런가?
"장소가 없다면 사랑은 구체적인 사건으로 실감되지 않는다. 사랑의 사건이 '함께 있음'의 행위라면, 장소는 함께 있음이라는 사건이 '그곳'에서 벌어졌음을 증거한다."
'장소의 연인들'은 무수한 문학작품에 등장했던 연인들의 '장소'를 고찰한 책이다. "사랑의 감정은 시간 속에서 명멸하지만, 사랑이라는 사건이 이뤄지기 위해선 장소가 필요하다"란 문장으로 책은 열린다.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러시앤캐시 1995년 소설 '책 읽어주는 남자'는 15세 소년 미하엘과 36세 여성 한나의 사랑을 다룬 작품이다.



미하엘과 한나의 연애는 한나의 방에서 이뤄졌다. 문맹인 한나는 소년이자 연인인 미하엘이 책을 읽어준 이후에만 사랑의 의식을 감행했다. 한나의 방은 은밀한 독서의 방이자 그 이후 취업지원대상자 비로소 치러지는 성애의 방이었던 것. 한나의 방은 물리적으로 고정된 장소이지만 둘은 같은 자리에서 여러 시공간을 함께 경험했다.
이란 작가 사데크 헤다야트의 1937년 소설 '눈먼 부엉이'에는 나무 아래에 앉은 노인, 그리고 이 노인에게 꽃 한 송이를 건네는 소녀를 반복적으로 그리는 '필통 화가'가 등장한다.
그런데 어 핸드폰 할부회선 느 날, 그림 속 소녀가 화가의 방으로 들어와 침대에 눕고는 조용히 죽어버린다. 사실 이 소녀는 그가 오래전 잃어버린 아내이자, 첫사랑이다. 이 노인은 화가 자신이기도 하다. 죽음과 증오가 뒤섞인 연인의 침대는 망실된 모든 것들의 무덤을 상징해낸다.
체코 소설가 보후밀 흐라발의 1976년 소설 '너무 시끄러운 고독'의 한탸는 35년간 지하 신용유의자 실에서 폐지를 압축한 말단 노동자다.
한탸는 천장에 난 뚜껑 문을 통해 쏟아지는 폐지를 압축기에 넣는 작업을 전담해왔다. 하지만 그에게 종이로 만들어진 책은 단지 폐지가 아니었다. 괴테, 니체, 횔덜린을 읽으며 그는 '밑바닥의 현인'이 됐다. 이제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집시 여인을 회상하면서, 그는 노동과 숭고의 중심에 서게 된다. 한탸의 대학생대출 지하실은 망각돼 가는 정신과 사랑이 떠도는 숭고한 방이 된다.
그렇다. 우리는 모두 '그곳'을 떠나왔다. 하지만 그곳에 다시 가더라도 그곳은 '이곳'일 수 없다. 극복할 수 없는 어떤 처연한 감정 속에, 그대와의 장소가 있(었)다. 책의 한 단락은 울림이 크다.
"연인들은 하나의 시간대에 살지 않는다. 연인들의 사소한 사건은 장소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모두 변모시킨다. 연인들의 장소는 기억 너머의 잔존과 미래의 시간 속에 있다. 연인들의 장소는 지나간 것과 도래할 것 사이에서 연인들의 몸을 감싼다."
[김유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