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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일 마지막 회차들이 공개되는 넷플릭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이하 '폭싹') 8화에는 대한민국의 혼란스러운 풍경이 나온다. 금명(이지은)의 아버지 관식(박해준)은 "데모하지 마라, 최루탄 맞으면 엄청 아프다. 군인 만나지 마라"며 딸에게 걱정 어린 당부를 한다.
최루탄이 날아다니는 상황도 걱정스럽고, 군인도 어떤 이유로든 위험했던 시대. 부모는 '자식 가슴에 옹이가 생기는 순간'까지 미리 다 막아주려고 애쓰지만, 현실이든 드라마든 삶은 남몰래 성큼 다가와 뺨을 후려치곤 한다.

출퇴근길 마주치던 벽돌 조각과 최루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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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을 꿈꾸는 극중 애순.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 한장면.


ⓒ 넷플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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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의 배경과 비슷한 1985년, 서울의 남부 끄트머리, 경기도와의 경계로부터 한강을 넘어 도심으로 가는 나의 출근길은 언제나 버거웠다. 쏟아지는 잠을 내쫓고 아침을 거르며 서둘러도 출근 시간에 겨우 맞출 수 있었다.

버스는 타기 전에도 언제나 만원이었는데 그럼 여성 직장 에도 꾸역꾸역 사람들은 버스 안으로 밀려들었고 버스의 문은 부풀었다 압축하는 것처럼 용트림을 몇 번 크게 하고서야 겨우 닫히곤 했다. 목적지에 도착해서 툭 떨궈지면 마치 혼돈의 세상에서 탈출한 느낌이었다.
퇴근길에 나서면 깨어진 벽돌 조각이나 최루가스의 잔해를 곳곳에서 마주해야 했다. 손수건은 필수였다. 종로 통부터 시작된 시위는 남대문, 주택관리공단 서울역까지 이어졌고 마른 손수건 사이로 파고드는 매캐한 최루가스의 연기는 목과 코를 찌르는 것처럼 자극했다. 고통 없이 마음껏 호흡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그때처럼 절감했던 적은 없을 것이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는 요즘 단연 독보적인 화제의 드라마다. 제목이 주는 토속적이고 뻔한 느낌과는 달리 드라마는 "친밀하고 단순한 해외직수입 이야기를 아름답고 정교한 연기를 통해 생생하게 구현됐다"는 평가를 받으며 공개 2주 차만에 600만 시청수를 기록하며 글로벌 톱 10 시리즈(비영어) 부문 2위에 등극했다고 한다.

나도 드라마를 보며 '내가 본' 것, '내가 아는' 것 같은 기시감을 많이 느꼈던 것 같다. 드라마는 시대적 상황과 배경이 무엇보다 분명하다. 그로 인해 인물들의 삶의 여정이 더 부각된다.










▲  폭싹 속았수다


ⓒ 넷플릭스




그러나 드라마를 보고 나면 시대과 배경은 어느새 사라지고 인물들의 이야기만 오롯이 남는 느낌이다. 나 역시 다사다난한 시절을 겪었고 지금은 내란의 중심을 통과하고 있지만, 다만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특히 문학소녀(였던) 애순의 시는 애순의 깊은 감성과 만나 짧지만 묵직한 울림을 준다. '노스탤지어'로 대표되는 애순의 시적 그리움과 소망은 관식의 지나치게 현실적이면서 무덤덤한 반응과 비교되며 더욱 강렬하고 사무치게 한다.
"나는 무조건 서울 놈한테 시집갈 거야. 섬 놈한테는 절대(안 가)! 급기야 노스탤지어도 모르는 놈은 절대, 네버!"
드라마를 보다보면 마치 대하소설 한 편을 읽는 것과 같은 느낌도 받는다. '벌교' 땅을 무대로 펼쳐지는 조정래 작가의 <태백산맥>의 느낌이나, 평사리 땅을 중심으로 최씨 일가의 3대에 걸친 파란만장한 삶을 조명하는 박경리 작가의 <토지>와 같은 지난한 인간들의 서사가 떠오르기도 한다.

드라마에서 애순의 시를 향한 열정은 유치환의 <깃발>로 표상되는데, 내게는 바로 그러한 지표가 박완서 작가다. 박완서 작가는 40세 나이가 되던 1970년 '여성동아' 여류 장편소설 공모에 당선되며 화려하게 등단했다. 학창 시절 작가의 작품을 접하게 된 이후로, 작가의 삶의 궤적은 곧바로 나의 꿈이 되었다.










▲  소설집 <친절한 복희씨>를 출간한 2007년 당시의 소설가 박완서 선생의 모습(자료사진).


ⓒ 연합뉴스




작가의 특이한 이력과 화려한 등단, 작품에서 드러나는 인물들의 이리저리 굽어 꺾여 있는 삶의 여정은, 나도 언젠가 한 번이라도, 반드시 삶을 직시하는 작품을 멋지게 써보고 싶다는 원대한 마음, 나만의 '노스탤지어'를 품게 했다.

등단작인 <나목>의 주인공 스무 살 이경의 삶은 특별하고 애잔하다. 젊은 여성의 시각에서 그리는 굴곡진 삶과 '전쟁과 시련의 상처라는 박완서 문학의 중요한 배경이 가장 잘 드러나 있는 작품으로 암담하고 불안한 시기에 텅 빈 서울에 남겨진 사람들의 전쟁의 상흔과 사랑, 예술에 대한 진심' 등이 담겨 있다고 평가받는다.
<나목>은 실제 박완서 작가가 스무 살에 PX(군부대 기지 내 매점) 초상화부에 근무하며 만난 박수근 화백을 떠올리며 쓴 소설이라고 한다. 전쟁과 그 상흔은 한국 문학에서 단골로 등장하는 소재지만 유독 박완서 작가의 작품 속에서는 시대와 인물, 특히 여성의 삶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기억에 없거나 희미한 먼 과거를 배경으로 하지만 가깝게 느껴지는 이야기, 인물이 살아 숨 쉬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와 소설 <나목>은 시간을 꿰뚫어 동시대적으로 다가온다.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와 삶에 대한 통찰을 바탕으로 암담했던 시절의 상처와 그늘진 삶, 인물의 심리와 태도가 실제 인물을 만나는 것처럼 선명하기 때문일 것이다.
결코 우리를 가엾게 내버려 둘 수는 없기에

그렇지, 나는 결코 나를 가엾게 내버려 둘 수는 없지. 나는 내가 조금씩 소중스러워졌다. 소중한 나를 배고프게 내버려 둘 수는 더군다나 없었다. 그러나 나는 미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나는 내 속에 감추어진 삶의 기쁨에의 끈질긴 집념을 알고 있다. 그것은 아직도 지치지 않고 깊이 도사려 있으면서 내가 죽지 못해 사는 시늉을 해야 하는 형벌 속에 있다는 것에 아랑곳없이 가끔 나와는 별개의 개체처럼 생동을 시도하는 것이었다. (<나목> 중)


내가 소중해진 '나'. 스스로를 소중하게 여기는 '나'. 그런 '나'를 가엾게 내버려 두지 않겠다는, 배고프게 내버려 둘 수 없다는 집념은 얼핏 사소하기에 더 대단하다. 인간으로서의 강인한 삶의 의지를 드러내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의 주인공 애순이나 애순의 엄마인 광례의 태도와도 다르지 않다.

12.3 비상계엄 이후, 현직 대통령의 탄핵 이후, 헌법재판소의 판결을 기다리며 연일 도심에서 집회가 이어지고 있다. 대통령의 탄핵 심판을 둘러싸고 찬반 양 진영이 대립하는 한바탕 전쟁 같은 상황은, 소설 속 좌익과 우익으로 나뉘어 극렬하게 냉대하며 대립했던 한국전쟁 이후의 모습을 방불케 한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주목하는 것은 탄핵을 촉구하는 집회에 나오는 20,30대 여성들이다. '광장을 자신의 바운더리'로 만든 이들은 한때 위안부 할머니들의 방패였으며, 남태령의 완고한 터널을 열게 한 주역이었다(관련 기사: 계엄날 군용차 막은 여성의 이야기...WP보도에 안 나온 것 https://omn.kr/2cot4 ).

또 비상계엄 이후 끝없이 지루하게 이어지는 혼란한 상황에서 나라의 안정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던지며 그들 나름의 생존 방식을 보여주고 있다.










▲  지난 15일 오후 서울 종로구 광화문앞에서 열린 ‘100만 시민총집중의 날 - 윤석열 즉각퇴진! 사회대개혁! 15차 범시민대행진’에 참석한 야당과 윤석열퇴진비상행동 소속 단체 및 시민들이 깃발, 응원봉 등을 흔들며 헌법재판소를 향해 행진하고 있다.


ⓒ 권우성




빛나는 응원봉과 노래로 탄핵의 정당성을 알리다니, 이 얼마나 멋진 문학적 비유인가. 다양한 깃발로 자신의 정체성을 표출하는 것은 또 얼마나 위대한 상징인가. 슬픈 현실에서 자칫 무거울 수 있는 집회를 기꺼이 명랑하게 이끄는 모습은 아름다운 역설이 아닐 수 없다.


2025년 광장의 '노스탤지어'는 겨울과 봄 사이 어디쯤, 잎이 지고 가지만 앙상히 남은 나무로부터 싹을 틔울 봄날을 기대하며 희망의 나목(裸木)으로 재발견하는 이경(소설 <나목>의 주인공)의 믿음과도 같은 것은 아닐까.



김장철 소슬바람에 떠는 나목. 이제 막 마지막 낙엽을 끝낸 김장철 나목이기에 봄은 아직 멀건만 근심스러운 마음에는 봄에의 향기가 애달프도록 절실하다. 그러나 보채지 않고 늠름하게 여러 가지들이 빈틈없이 완전한 조화를 이룬 채 서 있는 나목. 그 옆을 지나는 춥디 추운 김장철 여인들. 여인들의 눈앞에는 겨울이 있고, 나목에게는 아직 멀지만 봄에의 믿음이 있다. 봄에의 믿음. 나목을 저리도 꼿꼿하게 함이 바로 봄에의 믿음이리라.(<나목> 중)


나라의 명운이 위태롭지만, 하루를 사는 서민들에게는 대단한 철학적 바탕이나 이념적 체계가 중대하지 않다. 그럼에도 그들이 집회에 나가는 것은 오로지 친절과 품위, 자유와 평등의 생명력을 묵묵히 믿는 믿음에 따른 행동일 것이다.

참혹한 고통에서도 인간으로서의 본성을 지키며 살아남은 사람의 법이 결국 인간을 만든다. 또한 그 법이 언제든 교묘하게 비틀어 버릴 수 있는 법전의 행간보다 더 대단한 가치라고 믿는다.
그것이 <폭싹 속았수다> 속 광례와 애순, 이경의 삶으로부터 터득한 삶의 진리이며 지혜라고 믿는다. 또한 오늘도 각각의 '나'를 소중하게 여기는 국민들의 최후의 보루라고 믿는다.
덧붙이는 글